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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 걷기좋은”수원화성성곽길”트래킹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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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원래 수원화성 성곽은 지금의위치 보다 남쪽으로 약 8 km 떨어진 화산 아래가 중심이었다.  그런던 것이 조선조 정조13년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현제의 위치인 수원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관공서와 민가들을 팔달산 아래로 집단 이주시켰다.  현제의 수원은 그때  형성된 것이다. 수원화성 성곽길은 산책로가 잘 닦여있어 한결 걷기가 쉽다.  넓다란 잔디밭과 더불어 도시와 숲이 함께 어우러져있고, 요즘은 성벽주위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숲이 성벽을 타고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신선한기분과 느끼게 해주며  걷는동안 주변에서 아름다운풍광을 자아내고있다.   가끔씩 관광객들을 가득 태우고 오고가는 청룡열차가 성곽주위를 왕복하는 모습도 매우 행복해지고 낭만적인 모습이다.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은 모든 시름을 접고,  행복할수있다.  길가에는 아름다운 야생화 와 이름모를 풀,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형성하고있어  누구라도 한번쯤  걸어보고 싶은  마음을  들게한다.   또한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사적 제 3 호 로 지정되어있어 전세계 여행자들이 많이 찿는 세계적으로도 자랑할만한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재이다.  동쪽지형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50 개의 시설물로 아름다운 성곽을 이루고있다.  이중에 수해와 전란으로  7개의 시설물이 소실되었으며, 지금은 약 40개의 시설물이 남아있다.

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성벽둘래가  약 5.7 km 이고, 성곽을 따라  폴코스를 걸어도  약 10km 내 외 이므로 걷기 코스로도  큰 무리는 없는 듯하다.  수원성곽의 시설은 거리의 규모와 그 기능에 따라 51개의 시설물로 축조 되어있다.   주요시설 23개소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한국교유의 누각을 설치하였다.    당시 실학자로 불리우는 유형원과 정약용의 성설을 서계의기본 지침으로 삼아,  영의정 체재공이 성역을 주관하고 화성유수 조심태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 하면서도 우아하고 장험한 면모를 갖추었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전을 병용한것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용재를 규격화하고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과학기술에서 우리나라의 성곽건축 축조기술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표지판어쨌튼 터널 터널 성곽길을 걷노라면 정조에 대해서 많이 군금해진다. 그래서 자료를 찿아보았다.   정조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 중 수원화성 성곽의 축성동기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수원성곽의 축성목적은  군사적목적 보다는 정치적목적이 더 많았었다.  조선 22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예절한 효심이 가장 큰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양파간 싸움에서 조선의 정치는 살벌했었다.  정조가 제임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노론의 근거지인 한양을 떠나 과감한 개혁을 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이 정조는 필요로 했다.  이러한 의지를 굳혔던 정조는  양주에 있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화성으로 옮기는 일을  시작하게된다.  영조때 양파벌간에 살벌한 대립을 하고있었고, 당시  세자였던  사도세자를 어린 정조가 보는 가운데 뒤주에 갇혀 8 일만에 굶겨죽는 일이 벌어 지게된다.  사도세자가 한창 방황하고 고뇌할때,이를 이해하지않고 오히려  그  비행을 고발하고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일파 입장에서는 그의 아들인 세손인 정조 역시 미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왕위를 물려봤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튼 영조는 죽고, 정조가 그 왕위를 물려봤았다.  하지만 정조의 마음속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도세자에 대한 애처러운 마음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즉위 13년 되던해,  정조 18년 1월부터 20년 9월까지 2년 10개월동안  지금의 수원에 세계에 자랑할만한 화려하고 웅장한 수원성곽을 쌓았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옮기고,  그곳을 ‘형룡원’ 이라는 이름을 붙혔다.   정조는 이  새로운 도읍의 이름을  화성으로 하고,  49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 한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버지 사도세자와 더불어 화성과 함께 개혁을 꿈꾸었던 일대기도  마감하게 되고 끝나게된다.  역대 임금중에 가장 지략과 무예,군사에  능한 군주가 정조였던것이다.
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
이쯤에서 여행자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일대기도 군금해졌다.   사도세자  ( 장헌세자)  탄생과 뒤주속에서 억울한죽움을 당할때까지의 과정을 알아보기로 하여 과거로 돌아가봤다.   비극은 숙종때 남인과 서인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궁에서는 두 세력간의 대립이 살벌했었다.   당시 남인을 대표하는 장희빈과, 서인을 대표하는 인현왕후의 갈등으로 촉발된 것이라 할수있다.   숙종은  두여인이 소속된  남인과 서인을 적절히 기용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결국 나중엔 장희빈을 사약을먹여 사사하고, 남인을 몰락시키게 되지만 서인의 기득권은 기득권은 인정해주게된다.   당시 남인의 보호를 받고 있던 세자 (장희빈의 아들 ) 를 배척하면서  사도세자의 비극은 시작됐다.  숙종의 속마음은 세자를 폐하고,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과, 박명빈의 아들 연령군 중 하나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인들에게 세자가 아닌 연잉군과 연령군을 맡긴다는 유언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서인들은 유언을 세자가 아닌 연잉군에게 보위를 넘기는 유언을  받아들이고, 새로 등극한 세자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인들은 이러한 경종을 가운데 두고 다시 두파로 갈라지게 된다.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는 온건 소론과, 경종을 왕으로 인정 하지 않는 강경 노론이 팽팽이 맞선다.   경종은 왕위에 오르자 노론의 압력에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게되고,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주청하는 노론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수원화성수원화성성곽길이제 막  등극한 왕에게  이복 아우를 왕세자도 아닌 왕세제로 책봉하게 하는것은  현제의 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어지는 대리청정의 요구역시 현 왕에게  왕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종  2년까지 왕세제 연잉군을 앞세워  장악하던 노론에 맞서 소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이 왕권을 무시한 반역이라 여기고, 노론 4대신을 탄핵한 신임사화 (1722) 가 그것이다.  이 사화로 노론과 연잉군은 큰 고비를 겪게 되고, 소론이 잠시 득세하게 되지만, 아우를 사랑하는  경종의 마음을 움직인 연잉군은 목숨을 보존하게 된다.  그후 1724년 경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연잉군은  왕위를 물려봤는다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영조는 노론과 소론을 똑같이 기용하는 탕평제 실시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생사를 같이 했던 노론과 항상 함께 했고 , 소론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위협했던 신임사화를 일으킨 원훙으로 치부하게 된다.   영조 등극 25년 뒤, 장자인 효장세자 사망한지  7년후  외아들 사도세자가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기에  훌룡한 왕제의 재능이라했고, 소론과 노론 양쪽 모두가  유일한 왕세자로  여겼다.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영조와  노론과 소론의 힘겨루기를 지켜봤으며, 노론과 소론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때마다 펼쳐지는 양위소동에서 영문도 모르고 석고대죄 할수 밖에 없었다.   영조와 야당파가 주연하는 정치적쇼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조연을 담당할수 밖에 없었다.  이해할수 없는 사건의 반복은 세자로 하여금 근본적 원인을 파헤치게 만들었고,  그 의문은 소론과 노론에 대한 관계와 영조와 숙부인 경종의 관계를 알게 되면서 노론에 대한 반감은 커져가게 되었다.  영조가 툭하면 양위소동을 벌이며 경종이 자신을 대단히 사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로 숙부를 독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한다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사도세자의 이런 반노론은 노론은 물론이고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영조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런후  세자의 모든 정치적 행동은 영조에게 항시 감시할 대상이 된다.   사도세자가 뒤주속에서 죽은 것은 1762년  나이 28세였다.   이때는  왕제로서의 노련함과 덕은  영조를  넘어 백성으로 부터도  존경을 받고 있었다.   노론을 견재하고 소론과 남인을 신임하던 사도세자의 죽음은 어쩌면 10년 전 그의 적자인 혜경궁 홍씨 소생의 자,  가 출생하면서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후계자가 없는 왕은 기반이 취약했고, 과거 신임사화때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던 이유도, 경종을 제외하고 효종, 현종, 숙종의 삼종의 혈맥 을 이은 자손이 연잉군 (영조)  밖에 없었떤 이유가 컸다.  영조에게 왕권의 뿌리이자 자신이 왕이 될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자신이 삼종의 혈맥을 잇는 유일한 왕손이라는 것 뿐이다.
이제 자신의 아들이 사도세자 밖에 없는 상황에서 만약 세자가 적장손 산과 후궁에게서 아들을 보지 못했다면, 사도세자는 어쩌면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목숨을 부지 할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수원화성성곽길노론은  자신들이 죽인 아버지의 아들인 영조(이산) 을 죽이려 들지만, 이번에는 영조가 왕세손을 보호하게 된다.  왕세손 이산은 할어버지의 보호아래   22대 왕 정조로 왕위를 물려봤게된다.   정조 등극후 노론은 몸을 사릴수 밖에 없었지만, 정조 또한 아버지의 처절한 죽움에서 원수는 기억하지만 성급함은 좋지 않는것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정조 재위 24년 동안 정조의 견제속에 활동을 할 수 없었던 노론은 정조의 아들 순조의 등극 이후 이는 노론을 제대로 견제할수 있다는 정조의 자신감이 지나쳤던 결과로 그의 최대 실수 중 하나가 된다.  다시 기지개를 펴게 되니, 조선왕조의 비극 역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듯 한다.   당시 득세한 노론중 하나가 지금의 안동김씨다.
수원화성성곽길수원화성성곽길

수원화성 성곽가는길은 >>자가용을 이용할때.. 1 번 국도를 타고 화성행궁,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수원 IC 나와 화성행궁, 경부고속도로 수원 IC >> 화성행궁, 지하철 .. 수원역>>11,13,36,39 버스승차 >>화성행궁,  수원성곽주변 둘러볼곳,구경할곳,>>수원화성,정조의 어신을 모신 화령전, 화성열차, 국궁 화쏙 체험, 효원의 종 타종, 청룡열차 타고 수원성곽둘러보기,정조대왕능행차연시 체험,이 있다.  기타 자세한 문의는 수원화성우녕재단 홈페이지에 문의 하면된다.  총 걷는거리는 >>5.7km이지만 성벽을 따라 처음 집입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왕복코스로는 약 10km정도 된다.   소요시간은 2시간 30분 소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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