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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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여행기 마음속의 경기도 264. 광주시 남한산성행궁

작성자빌시수정일2018-11-13



분원도요지·팔당 물안개공원, 경안천 습지생태공원,
앵자봉·천진암, 무갑산, 태화산, 경기 도자박물관, 중대물빛공원과
마지막으로 남한산성을 포함하면
경기도 광주시가 자랑하는
광주 8경이 완성됩니다.


남한산성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를 두고 학계에서는 
676년 나당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신라 문무뫙 시기에 
이곳에 거대한 성을 쌓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통일신라 시기에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발굴과 
신라시대의 축성 방법도 혼재되어 있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고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편입시킨 상황에서
왜 수백만 명을 동원시켜서 이곳에 거대한 성을 쌓으려 했을까?​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뜻을 이루지만
당나라는 백제 멸망 660년에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합니다.
정벌한 지역에 군사행정 기구를 설치하여
통치를 하겠다는 뜻으로 웅진도독부를 포함에 총 5곳,
663년에는 동맹관계였던
신라에도 계림대도독부를 둡니다. 

신라에서는 도독부 설치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당의 세력을 물리칩니다. 

5년 뒤인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루지만 
당은 옛 고구려 땅에도 9곳에 도독부를 설치합니다. 

고구려 멸망 전에 신라 문무왕을
계림 대도독으로 임명한 것으로 보면 
신라마저도 통치하겠다는 속내를 보여준 것이니 
문무왕은 삼국통일 이후 도독부에 남아있는
신라의 자주권마저 부정하는 
당의 세력을 깨끗하게 몰아내려고 합니다. 
현재는 남한산성이라고 부르지만, 
삼국통일 이후에 당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672년에 쌓아 만든 주장성晝長城입니다. 
. (밤보다는) 길다는 뜻. 
결코 함락할 수 없는 요새를 만들었고 
676년 나당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납니다. 

3만 VS 20만

최대의 격전지(경기도 양주 또는 연천으로 추정)에서
당나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전투는 바로 매소성 전투.
20만 대군의 공격을 물리친 결정적인 이유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한 이유와 공통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투를 하기엔 추위도 힘들지만, 병사들에게 필요한 보급품이
적절한 시기에 전달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살길을 택하는 것은
지휘와 통제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





이곳에 도착하면 시대적 배경은 자동모드로 늘 조선이었지만,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문무왕의 입장에서 국운을 걸고
당의 세력을 철퇴시키고 자주권을 지키려는 뜻도 스며있으니
알면 알수록 값진 의미를 간직한 남한산성입니다.​




▲남한산성 행궁 (사적 480호)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임금이 임시로 머물렀던 행궁


조선시대에는 선대 왕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서, 
건강관리를 위해서, 전란으로 인한 위기 시 
피난 행차 시 행궁을 이용했습니다. 
역대 왕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종묘)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사직)을 둔 행궁은 이곳 남한행궁이 유일하다고 전합니다. 


군사 요충지로도 인식되어 오면서 남한산성을 고쳐 짓거나
보수하는 일은 인조 집권기기 돼서야 진행되었습니다.
명나라를 중시하는 외교정책으로의 변화와 인조 2년에는
한양까지 점령하기도 했던 반란이 일어나면서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자
주장성을 활용하여 1624(인조 2년) 년부터 시작해
28개월 동안 수축(개축) 및 행궁의 신축을 진행했습니다.
외성을 확장해 나가면서 총 연장 12.4km,
높이 7미터의 방어시설을 갖춘 확대된
성곽을 완성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외행전


▲남한산성 행궁 내행전


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던 '편전'의 기능을 하던 외행전과
외행전의 위치보다 높은 곳에서 취침을 하는 등의
생활 공간인 내행전을 보았습니다.
문화 해설사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방문객들은
내행전 대청마루에 걸터 앉아 제법 오랜 시간을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머물다가 떠나기도 합니다. 


내행전의 경우 좌우로 침전을 마련했고 
중앙부 대청에는 왕과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6폭의 병풍인 일월오봉도를 두었습니다.
병풍 앞에 둔 의자는 
'교의(용교의)'라고 부르는데
의자를 접어서 운반이 가
하도록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접이식 의자가 있었다는.)

왕의 침전과 세자의 침전을 분리하여 재현한 소품이 있어
볼거리를 제공하는 내행전의 모습입니다.​



 

남한산성 행궁에서 공연이 있으면
종종 언급되는 위치인 일장각입니다.

행궁이 있던 지역에도 유수부의 관직이 있었는데
광주 유수였던 이지연이 세운 관아시설이라고 전합니다.
앞서 주장성에 대한 언급을 했는데
낮이 길다는 뜻은 주장,
일장각의 '일장'의 의미
도 같습니다.
현재의 청량산을 당시엔 일장산이라도 불러
사진 속 관아시설은
일장각이라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이 완성된 200년이 지난 1829에 건립.



시기적으로 보면 일장각보다 앞서 지은 좌승당1817년
광주 유수에 의해 건립되어 집무용으로 활용했다 전합니다.
좌승(坐勝)의 뜻은 앉아서도 이긴다는
자신감 가득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길 수 있는 전술을 써서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외행전을 바라보면 왼쪽에 남행각이 있고,
내행전을 바라보면 오른쪽에 북행각이 있습니다.
좌승당이 건립되면서 북행각의 위치도 내행전 쪽으로 옮겨집니다.​


명위문(明威門)



후원으로 연결되는 명위문을 지나면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정자(이위정)이 보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좌승당을 지을 때
후원에 이위정도 같이 완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목적은 활을 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소개하는 안내판을 읽어보니 읽어볼 만한 문구가 있었습니다.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
충성과 용맹으로도 능히
천하를 위협할 수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소개되는 침괘정은
남한산성 행궁과 떨어진 위치지만 이곳에서 맞이하는
가을 풍경도 무척이나 근사했습니다.
침과정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지금까지도 침괘정이라고 읽은 이유도,
언제 건립된지도 알 수 없지만 남한산성 주변에서
만추를 만끽하고 싶다면 침괘정은
꼭 들려야 하는 이유를 사진 속 풍경이 전합니다.​





침괘정을 둘러 보고 남한산성 로터리(남문 안 로터리)에서
잠시 찾았던 곳은 남한산 초등학교.
분교를 연상하게 하는 아담한 크기와는 달리
가을을 품은 풍경은 반비례합니다.
시계탑 근처에는 해공 신익희 선생(독립운동가)의 조형물이 있습니다.
이 학교 첫 졸업생이기도 합니다. 

경기도에선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남한산 초등학교의 교훈은
'참 삶을 가꾸는 작고 아름다운 학교'입니다​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935-9
관람시간 : 오전 10시~ 오후5시
입장료: 성인 2천 원 / 청소년 천 원
(11월 1일부터 경기도민 무료입장)
주차료: 평일 3천 원 / 주말 5천 원
(단, 주차료 2자녀 가족 50% 할인 / 3자녀 가족​ 면제혜택)
대중교통: 8호선 산성역에서 9번, 9-1번 버스 환승 후 
남한산성 종점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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