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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연천~파주1] 경기도 휴전선 64마일을 따라 걷다

경기도의 DMZ 접경 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을 연결하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트래킹 코스 평화누리길


길을 걸었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 옆에 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이다. 노이즈캔슬링은 외부 잡음을 차단하거나 상쇄하는 기술이다. 보통 출퇴근을 하게 되며 애용하게 되는데, 노이즈캔슬링 버튼을 누르면 귀가 먹먹해지고, 외부 소음은 들리지 않게 된다. 그렇게 북적대는 지하철 안에서도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
평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노이즈캔슬링 모드를 떠올리게 된다. 내게 둘의 관계는 밀접하다. ‘평화’라는 게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고요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외침을 막아 나를 보호해야 자유와 평화가 생기듯 일상에서 원하지 않는 이의 공격을 막아내고 침입의 흔적을 지워내기를 원하며 살고 있다.
지금 나는 연천에서 김포까지 평화누리길 순례에 나섰다. 나의 베프인 노이즈캔슬링 헤드폰과 함께. MZ 세대인 내게 평화누리길을 걷는 여행은 무척이 낯선 일이다. 6.25전쟁은 베트남전쟁만큼이나 미지에 가깝고, 국가적인 차윈의 평화를 상상하는 일은 내 몸 가까이에 있는 일이 아닌 탓이다.
천천히 길을 걷다 보니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내가 한 번도 속하거나 경험해 본 적 없는 공간을 향해 가는 일이고, 만나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만나러 걸음하는 일이니까.


평화누리길은 2010년 경기도의 DMZ 접경 지역인 김포시, 고양시, 파주시, 연천군을 연결하는 대한민국 최북단의 트래킹 코스다. 평화누리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길은 다양한 경기도의 역사 유적부터 자연과 문화적 공간들을 가로지르며, 평화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이 평화누리길을 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밟았는데, 지역으로 크게 분류하면 연천, 파주, 김포 순으로 방문했다.


첫 행선지가 된 연천을 먼저 살펴보자. 연천은 서쪽과 북쪽이 각각 황해도에 접해 있는 지역으로, 이곳은 전쟁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라진 경기도 삭녕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연천 평화누리길 11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신탄리역에서부터 출발했다.

신탄리역1

신탄리역

신탄리역은 현재 운행하지 않는 역이다. 고요한 분위기 속 마을 어귀의 쉼터에 모인 어르신들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조촐한 역사 안쪽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긴 철로가 펼쳐졌다. 철로 사이사이 깔린 자갈이 운동화 밑창에 닿는 감촉이나 차갑고 깨끗한 바람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 좋아 잠깐 기찻길 위를 거닐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길의 끄트머리 즈음 서 있는 노란색 표지판이 보였다. 무슨 표지판인지 궁금해져 철로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보기로 했다. 점점 가까워지자 노란 표지판 위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신탄리역2

알고 보니 그곳은 경원선 철도중단점이었다. 경원선은 서울에서 북한 원산까지를 연결하던 철도 노선으로, 1914년부터 개통되어 한반도가 삼팔선으로 나뉘기 전까지도 운행하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날랐다. 현재 휴전선 너머의 평강 사이 철길은 폐지되어서 이곳이 철도중단점이 되었다고.
늘 오가던 길, 실컷 달릴 수 있던 길이 하루아침에 막히는 일을 상상하면 막막해진다. 생명이 없는 열차에게 아마 마음이랄 것이 없을 테지만, 매일 아침 이 표지판을 보며 살아 왔을 인근 주민들에게는 명백하게 있을 테니까. 그 막막함이 눈에 어려 나는 참지 못하고 뒤돌아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다시. 신탄리역을 향해서.

옥녀봉 그리팅맨

그리팅맨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옥녀봉 언덕을 올라야했다. 산을 돌아 천천히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아직 닦이지 않아 험한 길이었다. 중간중간 공사 중인 인부 분들께 길을 물어야 했고, 그중 한 분은 친절한 안내 끝에 조심히 가라며 인사해 주셨다. 대답하면서도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말 조심을 해야 하는 길이었다. 차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며 여러 번 미끄러질 듯했으니 말이다. 밑창이 두꺼운 신발을 신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언덕 중반에 다다르자 그리팅맨이 보였다. 커다란 조형물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팅맨1

그러나 그 조형물 자체보다 먼저 와닿았던 건 그곳의 높이였다. 주변의 산봉우리와 가로질러 온 도로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높은 곳에 와야 하는구나. 이렇게 높은 곳에 와야 철조망 건너편을 볼 수 있겠구나. 새삼스레 생각했다.

그리팅맨2

그리팅맨은 10m 높이의 거대한 조각상이다. 그는 커다란 몸집과는 달리 15도 정도로 몸을 숙인 채 내게 정중한 인사를 해 보이고 있었다. 예의 바르고 수줍음이 많은 거인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상상하며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그리팅맨은 연천 옥녀봉뿐 아니라 한국의 양구 해안마을, 제주도 서귀포뿐만 아니라 우루과이, 파니마시티에도 세워져 있으며, 한국의 인사를 통해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좋은 대화를 나누려면 인사는 필수적이니. 나도 고개를 꾸벅 숙여 본 후 뒤를 돌았다. 그가 뒤에서 내게 조심히 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팅맨3
동이리 주상절리

동이리 주상절리는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합수머리 중에서도 임진강 상류 쪽에 위치한다.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도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한반도 지질을 고루 살펴볼 수 있는 교과서 같은 공간인데, 특히 동이리 주상절리는 보통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 주상절리와는 달리 강가에 형성되어 있어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동이리주상절리1

수많은 기둥 모양의 암석이 촘촘히 서 있는 모습은 내게 책이 빼곡하게 꽂힌 도서관의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이곳은 오랜 시간, 수많은 파도의 손길로 만들어진 도서관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높이 25m, 길이 2km 정도라는 주상절리 길을 따라 걸으면서 서가를 거닐며 느끼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가을이 되어 단풍이 물들면 주상절리의 절벽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임진적벽’이라고도 불린다 한다. 날이 좋은 가을에 꼭 다시 찾고 싶은 공간이었다.

동이리주상절리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