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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파주~김포1] 경기도 휴전선 64마일을 따라 걷다

북한과 통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 파주

 

매해 6월이면 다양한 종류의 통일 행사가 열리고, 어린 시절 나도 학교에서 이런저런 통일 포스터를 그리거나 통일 글짓기를 했다. 가장 많이 쓰였던 표어는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그러나 나의 소원은 통일인 적이 없었다. 나쁜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다. 이 말이 무의미하다 비꼬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실이 그렇다는 거다. 어린 시절의 내가 소원이라 부를 만큼 간절히 빌었던 것은 스누피가 그려진 크레파스 세트를 갖는 것 정도였으니까. 통일 같은 것에 관심을 둘 리 없는 어린이였다. 놀기 좋아하는 어린이라면 모름지기 그럴 테고.


지금에 와서 뒤늦게 돌이켜 보면, 어린이였던 내가 북한에 대해 알게 된 방식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자주 의문스러워하는 것은, 어른들이 통일이나 북한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을 왜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설명했을까 하는 부분이다. 내가 어린 시절 대개의 어른들은 북한이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고, 그 증거로 무시무시한 고문과 가난을 끔찍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하거나 자료를 보여 주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북한이 나쁘고 북한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며 이런저런 양국의 이득을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내게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이야기들이었고, 약간의 트라우마처럼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그림이나 사진 자료들도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사실일 것이다. 북한은 현재도 국제 사회가 입을 모아 이르는 ‘최악의 독재 국가’니까. 그러나 그런 것들이 어린이 마음에 진실하게 가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겁을 주는 일에 가깝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린이가 잘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 계속해서 잘 모르도록, 혹은 잘 모르고 싶도록 만드는 일에 가깝다.


지금도 나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다. 나는 나의 안위를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평범할 정도로 이기적인 개인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가, 내게 남은 그 미지의 영역을 다시 들여다보기로 한다. 내가 제대로 목도하지 못했을 그 창.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 되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상상력이 필요할까.


그런 의미에서 파주에 대해 말하고 싶다. 파주에는 북한과 통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다. 과거의 아픔과 미래의 상상력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며 임진강 너머를 보는 것은, 책이나 자료로는 익힐 수 없는 경험과 감각을 주었다.
파주는 어느 곳보다도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도시다. 출판 도시라는 명성답게 많은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헤이리마을이나 프로방스마을, 한국 근현대사박물관 등 콘셉트가 확실하고 특색이 짙은 공간들이 많다. 지역적으로는 북서부를 군사분계선으로 두고 있는 지역으로, 임진강이 북녘을 가로지른다. 파주의 평화누리길로 향해 보자.

임진각평화누리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은 군사분계선에서 7km 남쪽,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다. 이곳은 다른 평화누리길의 관광지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다양한 가족 단위의 관광객들,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사실 ‘평화누리’라는 이름이 붙기 이전의 임진각은, 분단의 슬픔을 그대로 껴안은 공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중에는 참담한 전쟁터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이곳에는 전쟁 초기에 폭파된 흔적이 남아 있는 임진강 철교, 공산군 포로들이 자유를 찾아 건너왔던 자유의 다리도 남아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많은 북한 실향민들이 찾아오고, 추모 제단인 망배단에서 고향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임진각평화누리2

그러나 현재는 다양한 전쟁 유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평화의 상징으로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설 중 하나인 임진각 평화 곤돌라나 놀이공원 평화랜드는 아이들이 뛰놀기 더없이 좋다.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과 수상 야외 공연장, 3,000개의 형형색색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풍경을 만나볼 수 있는 ‘바람의 언덕’ 등 이곳은 이제 여러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임진각평화누리3

여행 내내 한적한 공간들을 위주로 거닐었던 터라 많은 어린이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기뻤다. 마침 바람이 좋아 수많은 바람개비가 도는 풍경과 함께 왁자한 웃음소리가 함께 울렸다. 이곳에 온 아이들이 이 날을, 이 공간을 기억할까? 아이들이 이곳에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서, 언젠가 이곳에 다시 한 번 걸음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구정
반구정

어둑한 터널을 하나 건너자 한적한 한옥 건물에 다다랐다. 표를 끊고 낮은 담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나무를 사이에 두고 오솔길이 둘러져 있었다. 나무를 에둘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구정2

반구정은 임진강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기암 절벽 위에 만들어진 정자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방촌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보낸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것 같다. 때문인지 이곳저곳 황희 선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동상이나 기념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이곳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전소되었는데, 이후 후손들이 복원하여 현재에는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반구정3

반구정은 계단을 오르면 닿을 수 있다. 꽤 높은 계단을 올라 잠시 신발을 벗고 앉아 보았다. 드넓은 하늘과 임진강의 경치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좋았다. 지금은 군사 지역으로 분류되어 곁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지만, 그래도 매우 고요해 평화롭게 느껴졌다. 철조망을 보고도 평화로이 느낀다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날씨가 좋다면 내내 그곳에서 머물며 낮잠도 자고 차도 마시고 싶어지는 고즈넉한 곳이었다.